끝나지 않는 심증의 리스트
한 집요한 탐정을 상상해 보자. 그의 직능은 범인이 남긴 단서들을 취합해 익명의 인물을 망상하는 일이다. 집착적으로, 때로는 허무맹랑하게 작성된 심증의 리스트는 수사 기록의 형태로 펼쳐진다. 단서들의 종합이 어떤 원형을 가리킬 때까지, 화이트보드는 종과 횡으로 끝없이 확장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탐정이 능수능란한 것은 아니다. 때로 단서는 흩어지고 원형은 실종되며, 화이트보드는 증거가 아닌 믿음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의심스러운 정황에 집착해 새로운 단서를 수집하고, 물증과 심증을 뒤섞어 진실과는 무관한 파국에 다다르는 결말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확증편향으로 치부됐던 추리가 유일하게 실체에 닿았던 가정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글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미완의 화이트보드에 화답하기 위한, 또 하나의 화이트보드로서의 글쓰기다.
물론 김다솔을 탐정에 빗대는 일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의 작업에서 사건이란 우연히 주어진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설계된다. 그는 말이 없는 몸짓들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그것들이 “각자의 의중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침묵하는 기호—이를테면 특유의 보폭, 노동에 의해 형성된 자세, 반복되는 제스처와 같은 ‘훈육된 몸’의 습관들—를 그는 빈번히 따라 해본다. 그에게 작업의 동력이 되는 것은 ‘타인의 몸짓’을 깊이 이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그는 불투명한 움직임들을 제 몸 위에 포개어 놓는다. 그렇게 김다솔은 의문스러운 몸짓들을 추적하며, 그 뒤편에 자리할 (혹은 부재할) 그림자를 습관적으로 더듬는다. 이로써 그는 의중을 추정함으로써 의중을 발명한다.
몸짓의 배후에 가닿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는 점차 심화된다. 전면과 이면의 관계에 골몰하던 그는, 기묘하게도 퍼포머를 섭외해 “당신의 몸짓을 기록해 주세요”라고 요청한다. 이때 작가가 준비한 기록 매체는 스캐너로, 퍼포머는 느슨한 요청에 호응하며 저장 매체의 규격에 자신을 투영하는 방식을 학습해 간다. 스캐너는 빛을 내는 짧은 순간 접면의 이미지만을 기록한다. 이 제한된 속도와 면적에 점차로 적응하는 퍼포머는, 유리판 위로 신체를 눌러 붙여 미끄러지듯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스캐너 특정적이라 부를 법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순간의 안무’가 완성된다.
퍼포머는 김다솔의 제안(연출)과 수행 사이에서 준자율적으로 움직였고, 그렇게 실황된 몸짓은 압착된 신체 이미지로 남았다. 이 일련의 과정은 전문가의 몸짓을 통해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를 품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완결된 의미로 기능하는 대신 수수께끼 같은 공란을 되돌려준다. 김다솔은 퍼포머의 움직임이 남긴 리듬과 왜곡을 하나의 암호처럼 마주하며 이를 재차 풀어내려 한다. 스캐너로 매개된 몸짓의 단면을 통해, 김다솔은 이를 파생한 3차원의 동작을, 나아가 이를 결정했던 퍼포머의 암묵지를 다시금 추정한다. 대상에 가닿기 위한 프로세스는 또 다른 행간을 파생한다. 그렇게 읽기의 단계를 거듭할수록 원형은 멀어지며, 하염없이 늘어나는 단서들은 도돌이표를 구성한다.
김다솔에게 기록과 원형 사이의 공란은 새로운 이해의 차원을 요청하기에, 이번에 그는 붓과 색연필을 들고 ‘조형적으로 이해하기’를 수행한다. 그는 열화상 색 체계를 기반으로 수십 장의 드로잉을 제작하거나, 복호화의 정념을 담은 붓질로 퍼포머의 몸짓을 재차 번안한다. 인간의 가시 능력으로는 식별할 수 없는 온도를 시각화하고, 퍼포머에 대응하는 안무 형식을 그리는 방식에 적용한다. 또한 스캐너의 발광 센서 속도에 따라 늘어진 신체 이미지에, 도자라는 새로운 몸체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감각 범위를 초과하는 대상을 의태해 원형에 가닿으려는 시도이자, 신체의 휘발성을 그리기(혹은 소조)의 휘발성으로 붙잡고자 하는 따라 하기의 형식이다.
하지만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추리 도구(매체) 또한 찜찜하게 느낀다. 이를테면 김다솔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회화스럽다’, ‘도자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간극을 감지하고, 자신이 선택한 매체에 의심의 시선을 던진다. 매체를 곧이곧대로 직시할 수 없는 오늘의 시점을 감안할 때 그의 에두른 표현은 얼마간 예시적이다. 미학적 매체를 통로 삼아 불순물 없는 원형에 가닿을 수 있다는 믿음이 무용해진 오늘, 암묵지의 영역에서 실재에 근접하는 감각 또한 그 자체로 불신의 도마에 오른다. 어쩌면 그것이 ‘~스럽다’라는 표현에 담긴 거리두기의 저의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저 너머’에 가닿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 사이에서, 이를테면 여전히 진실과 환영 사이에서 진동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김다솔은 그 무엇도 선뜻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믿음직스러운 불신들을 긁어모은다.
하지만 이쯤 되니, 나름의 화이트보드를 늘려가던 나에게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결과적으로 관객이 전시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와닿았던 타인의 몸짓을 작가 스스로가 새로이 감각하고 이해하기 위한 추리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이 단서들을 종합했을 때, 우리는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가? 확답할 수 없다. 다만,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심증의 리스트 속에서, 우리는 단서의 종합을 통해 원형을 초과하는 것, 혹은 원형과의 시차를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점차로 선명도를 잃어가는 타인의 실루엣이자, 이 흐릿해지는 대상에 대한 인지의 궤적을 어떻게든 붙잡기 위한 시행착오에서 파생한다. 이러한 수행은 수행의 외부를 생생하게 감각시킨다는 점에서, 이쯤에서 나는 화이트보드의 이어 쓰기를 중단하고자 한다. 끝나지 않는 심증의 리스트는 생생한 공란을 남겼다. 그리고 그 공란은 새로운 세입자를 기다린다.
글_황웅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