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규무와 유수진의 우연한 만남에서 이어진 《대각선의 대화》는 교차하는 선들이 비스듬히 구성하는 세계를 탐사한다. 양립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두 언어는, 타자라는 축을 바탕으로 상동성 을 보이며 서로의 공간을 조직한다.
유수진은 주로 자신을 거치거나 겪는 이미지를 그린다. 그런 이미지는, 이를테면 우연히 찍힌 사진이나 메모, 인터넷 화면 캡처와 같이 자신의 곁을 맴도는 보통 이하의 것이다. 어떤 물건이나 풍경의 선호가 한 개인의 반복된 삶의 축적에서 형성된 경향이자 의도적 선택이라고 한다면, 유수진의 이미지는 특정 의도나 선택이 아닌 일종의 비-취향, 어떤 계열이나 분류에 걸치지 않고 빗나가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유수진은 작업 과정에서 자신이 명확히 알지 못하는 어떤 장소를 매번 방문한다. 유수진의 회화는 자신을 구축했으나 자신에게 여전히 불투명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움직임이다. 그러나 기억의 지층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재배열과 재전사(re-transcription)로 덧씌워지는 것처럼, 평범한 이미지는 유수진의 반복적인 환기와 재구상을 통해 굴절된다. 유수진의 역동적인 제스처는 사진의 데이터를 그대로 옮기는 대신, 엷은 레이어 위에서 서로 주장하는 빛들이 덜 섞인 채 움직이도록 한다.
동시에, 유수진의 회화는 산재하는 이미지로 작성된 병우편이다. 수취인 없이 바다 위를 떠다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도착하는 편지처럼, 의미의 부스러기는 유수진을 거쳐 우송된다. 작가는 편지의 작 성자로부터 물러나고, 미연을 향해 미리 앞당겨 쓰여진 편지가 익명에게 전달된다. 각각의 화면은 유수 진이라는 개인의 고유한 관점을 그리기보다 타자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매개체로 열려 있다. 유수진은 타자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그 권한을 위임하고, 작품의 의미를 한정하는 작가의 위치로부터 거듭 물러난다. 뻔하고 범속한 것에 질문하고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드는 것은 일상적 삶에 갈라진 틈을 만들고, 놀라움과 예측할 수 없는 효과를 야기한다. 가장 모호한 개별적 경험이 다른 이의 구체적인 경험을 불러내는 연결로 변환된다.
배규무의 작업은 특정한 사물보다 생명을 이루는 관계 자체를 표현하려 한다. 모든 유기체는 자기 삶의 지속을 추구하며, 이로 인해 다른 존재와의 교류가 불가피하다. 인간 체내의 미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추구하는 국소적 관계에서부터 무한히 확장 가능한 유일한 본질, 삶을 견인하는 욕망이 바로 배규무가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인과의 연쇄를, 타자와의 관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런 함께함은 평화롭게만 진행되지 않는다. 함께함은 욕망을 긍정하며 서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생존의 단초를 공유하는 것이다.
배규무의 작업에서는 자연과 문명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 세계의 사랑과 헌신은 원시적 폭력성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비정형적인 틀 위에서 사물이나 상징과 격돌하는 것은 규범적 질서와 이성의 통제 아래 지하에 격리된 육체, 머리 없는 몸이다. 펠트의 거친 표면과 질감 위에서 등장하는 이질적 요소들은 생명의 작동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오일파스텔이 그리는 생명력은 피부의 윤곽을 뚫고 통제할 수 없이 흐른다.
유기체는 자기의 삶을 계속하기 위해 생산하고 먹어야만 한다는 일반 법칙에 종속되며, 이것은 필연 적인 돌출과 과잉을 유발한다. 성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잉의 폭발은 주체에게 위협적이며, 여기에 휘 말리지 않기 위해 흘러넘침은 전달되어야 한다. 초과분의 교환은 곧 서로의 기작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잇대는 행위다. 이와 함께 삶과 죽음은 순환하고, 생명은 뒤얽힌다. 주체를 주조하고, 우리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항상 나를 초과하는 타자의 흘러넘침이다.
배규무가 그리는 이 비극적 관계는 주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 피륙 위에서 주체는 수많은 연결 중 겨우 하나일 뿐이다. 신체는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부터 무한히 많은 타자의 접촉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신체는 이미 타자성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고, 자아란 “타자를 품은 혼종적 존재”다. ‘나’에 맞서는 상대나 행위의 대상으로서 타자의 의미는 완전히 전환된다.
두 작가의 작업은 서로의 특색과 차이를 균질화하지 않으면서도, 중심을 비우고 절대적인 주체의 자리로부터 물러난다. 타자는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희석되거나 증발됨 없이 움켜쥐는 손을 빠져나간다. 돈호법으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를 한계까지 몰아세우고 과제를 부여하며, 응답을 요구한다. 이처럼 허구적인 기원을 가정하는 대신, 두 작가는 타자를 직면하고 비-총체성으로서 우리를 향하길 제안한다. (일부발췌)